| 양요나
www.yonas.co.kr 대표
디자이너, 철학자, 작가, 정치가, 교수, 정보생산자 | | 디자이너의 종말 | | |
디자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디자인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써서 예술과 디자인을 분리시키려고 노력을 하지만, 디자인의 역사와 철학이 예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술의 시작은 지배자들을 위한 통치의 수단이었다. 신과의 만남을 위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사람들, 왕관을 쓰고 있는 사람들,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들, 그림으로 기록되는 사람들은 모두 지배자들이다. 이들은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을 움직이는 예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지를 쓰고 있는 지배자들을 디자이너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그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디자이너보다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지배자들이 입고 있는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디자이너다. 다시 말해서 ‘쟁이’ 들이다. 옷을 만들지만 쟁이가 원하는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가 원하는 옷을 만든다. 지배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디자이너다. 생각은 그들이 하고 디자이너는 생산을 해낸다. 디자이너는 역사적으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생산해낼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한계이며, 답답함이다. |
|
|
지금도 이러한 역사적, 철학적 한계는 그대로 존재한다. 쟁이라는 단어가 디자이너라는 고급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답답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쟁이가 만든 작품은 대부분 예술이 되지 못한다. 생각이 담겨있지 않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왕관을 쓴 사람은 기억되지만, 왕관을 만든 사람은 잊혀진다. 힘을 가진 자의 생각이 디자이너를 움직이게 하므로, 디자이너는 언제나 잊혀지게 된다. 받아쓰기와 같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글을 적도록 한다면, 글을 잘 쓰는 사람의 글 일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의 글은 아니다. 하지만, 글을 이해하고 나의 생각을 담아 글을 쓴다면 그것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의 작품이 된다. 디자이너는 언제나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 사라질 것인가? 남을 것인가?
디자이너는 스스로 보통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몇몇의 디자이너들은 우월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지를 해석하고 생산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말하는 디자인의 영역을 넘어 선다. 인간으로 존경 받는 사람들이다. 이미지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은 동물을 뛰어넘는 초능력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누구나 쓰지는 못한다.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 되었을 때 초능력이 발휘된다. 그들은 엄청난 노력과 끈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고된 시간을 통해 초능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보통사람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이런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초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다. 인정 받는 디자이너들은 바로 아티스트의 위치에 있다.
이미지는 이제 대중화 되었다. 이미지의 수준이 올라가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도 이미지를 읽고 생산한다. 기존의 기술만 가지고 이미지를 해석하지 못하는 디자이너들은 보통사람보다도 못한 존재다. 이제 기술(그림 그리고, 프로그램 다루고…)만 가진 디자이너의 종말을 고한다. 디자이너가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르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당신을 당연히 무시할 것이다. 디자이너의 속성에서 벗어나 아티스트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디자이너라는 이름은 남의 생각을 받아들여 만드는 사람이라는 쟁이에서, 나의 생각을 담아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다. 한단계 더 올라 가려면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가져야 한다. |
|
|
쟁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가 수준이 낮다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디자이너라면 그 자리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당신은 답답해 하고 있으며, 위치를 이동하고자 한다. 그 바람에 대한 답을 하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
|
점은 살아있는 입체다. 점은 평면이 아닌 입체다. 점이 입체가 될 때 느낌이 살아나고 경험이 입혀진다. 의미(이야기)를 가지게 된다. 점의 연결이 선이 아니다. 선은 입체다. 점이 모여 선과 형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점 자체가 형태다. 점이 입체가 되면 상하좌우를 가지게 되고 점이 움직이면 선과 형태가 만들어진다. 궁극적으로 점이 선이 되고 형태가 되고 입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 자체가 현실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현실과 같은 입체로 해석되어질 때 그 의미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점이 생기려면 어떤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종이 위에 점이 하나 찍혀 있다. 연필, 샤프, 볼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점의 굵기에 따라 달라진다. 어찌 되었건 점이 찍히려면 점이 만들어지게 되는 움직임이 있다. 그 움직임은 이미 입체다. 점이 의미하는 것이 "찌름"이라면 찌름은 들어갔다 나오는 선을 가지고, 그 선은 찌르는 공간을 진동 시킨다. 바로 점은 입체로 존재하는 살아있는 물질이다.
웬만한 점
아침에 일어나보니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어디 선가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웬만한 구멍하나에서 웬만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견딜만하다. 텔레비전에서는 모레쯤에는 다시 따뜻해진다고 한다. 웬만하면 막지 않고 그냥 두려 한다.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덤벼들어 막을 정도는 아니다. 그냥 둔다.
구멍으로 여자아이들이 노는 모양이 보인다. 웬만하게 보인다. 잘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형태는 보인다. 눈을 들이대고 본다. 웬만해서는 들키지 않을 크기다. 크게 구멍을 내고 싶지만 그건 웬만하면 들킨다. 웬만하면 안 들키고 싶다. 그래서 웬만한 구멍으로 만족한다.
우산에 구멍이 뚫렸다. 한 두 방울 떨어진다. 웬만해서 옷을 젖을 것 같지 않다. 그냥 둔다.
웬만한 점이다. 그리 부담도 없고, 그렇다고 기능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둔다.
뼈만 남은 물고기는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고 물의 가운데에서 웬만하게 떠있다.
콕 찌른 점
속이 거북하다. 트름이 자꾸만 나온다. 전혀 시원하다. 나중에는 게워내듯 트름을 한다. 사이다를 먹고 약을 먹어도 계속 된다. 며칠이 지났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무섭지만 손을 따기로 했다. 아무도 없다. 직접 따기로 했다. 바늘을 찾아놓고 손을 훑어내려 엄지로 피를 모으고 실로 팽팽하게 묶어 피로 채운다. 바늘을 들고, 이를 질끈 물고 콕 찌른다. 아주 검붉은 피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박힌 점
손가락 끝이 따끔따끔하다. 유심히 쳐다보니 작은 가시 하나가 박혀있다. 손톱을 밀어넣어 떼어내려 하지만 되지 않는다. 바늘을 가져와 손톱 밑 피부를 들어내고 살을 약간 파고들어가 가시를 꺼낸다. 식은 땀이 난다. 작고 야무진 점은 위에 있어도, 박혀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 글을 보고 디자이너들은 우리는 아티스트와 다르다고 말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디자이너다. 다만, 지금 이미지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능력으로 디자인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정한 아티스트의 수준으로 이미지를 읽고 생산하게 된다. 아티스트의 수준이 되지 않으면 디자이너로써의 삶 또한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 이야기하고 부분은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아티스트는 아니다. 대부분은 아티스트가 아니다. 생각을 이미지에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도 디자이너와 마찬가지로 가짜 아티스트라는 이름에 종말을 고하기 바란다.
디자인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대학, 입시학원, 컴퓨터학원들의 교육이 현재처럼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길지 않은 기간동안 공부를 하면서 전혀 이미지를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주지 않고 있으며, 이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능력 또한 만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를 가르치면서 진짜 상상력을 가르치고 있는지 정말 마음이 아프다.
|
|
|
|